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골퍼가 골프를 잘 하기 위해서는 기술 하나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경영자가 어느 회사를 멋지게 경영하는 것이 능력만 가지고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훌륭한 골퍼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량을 뒤받침 해주는 여건들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들어 내장객을 위한 편의시설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필드여건은 훌륭한 골프를 할 수 있는 최대의 요인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필드조건에서 잔디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골퍼들이 가장 많이 불평을 하는 것이 바로 잔디 부문이기 때문이다. 잔디가 그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자생하고 있는 상태를 벗어나 이제는 경기장 중심부에서 어엿하게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었으니 대견스러울 뿐이다.
'심심산천에 붙은 불은 가신 임 무덤가에 금잔디….' 김소월 시인의 '금잔디' 속에서 간신히 잔디의 존재가 확인될 정도로 우리의 잔디 감각은 무뎠으며, 봉분의 피복용으로 애용되는데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동네축구가 월드컵의 세계로 날개달 듯 비약한 데에는 잔디가 매우 큰 몫을 했다. 진흙탕으로 뒤범벅이된 구장들이 어엿한 잔디밭으로 모습을 바꿨고,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산천이 이제는 푸른 잔디와 수목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제는 잔디구장에서 축구를 하고 잔디로 덮인 필드에서 골프를 하는 모습은 우리 눈에 익은 광경이 되었다.
원래 풀밭에서 시작된 골프이기에 잔디밭이 아니면 골프는 생각할 수가 없다. 프로골퍼 박세리, 김미현 그리고 최경주는 바로 골프 때문에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장본인들이 되었다. 골프장 없는 골퍼를 생각할 수 없는데도 골프장의 잔디를 가지고는 말들이 너무 많다. 특히 골프장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그렇게 반기는 듯한 눈길들이 아니다. 심지어 골프장이 들어서면 우리나라 환경은 모조리 파괴가 되는 양 아무런 책임의식을 갖지 않은 채 떠들어대고 있다.
정말로 그런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잔디를 잘 모르고 하는 말들이다.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은 실험적 근거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잔디밭을 조성해서 그 위에서 공놀이를 하는 것이 결코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다.
온대지방이라고는 하나 여름이면 몬순지대에 가가운 기후를 보이는 것이 우리나라의 특징이다. 최근에 와서 여름 한 철에 쏟아붓는 비를 보면 엄청나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막는데 수목만 가지고는 역부족이다.
잔디가 우리 생활에서 매우 유익하다는 것은 이처럼 골프나 축구, 야구장 등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인간에게 주는 혜택이 무한하기 때문에 자투리땅이라도 빈틈만 있으면 잔디를 심어야 한다. [잘다란 때(茅草)], 이것을 줄여 잔디라고 말한다. 그러나 띠는 학명으로 Imperata 속에 속하고 잔디는 Zoysia 속에 속하고 있으니 띠와 잔디는 전혀 다른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학명 따위의 과학적 용어가 아니더라도 우리 조상들은 띠모양의 작은 띠 즉, 잔디라고 우리는 불렀고, 중국의 천자는 임금을 책봉하면서 그 나라에 띠까지 심어 하사했을 만큼 귀중한 식물로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 고려띠(高麗茅고)는 려지(高麗紙)와 함께 중국에서 소문난 우리의 특산물로 인정되었다. 질이 좋지 않았다면야 이렇게까지 귀중하게 여길 일이 아닌데 마이다.
자연환경에 적극 순응하며 살았던 옛날에도 우리나라 잔디의 질이 높이 평가되었는데 근래에 와서 이것을 다시 미국인에 의해 호평에 가까운 재평가가 내려져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백년 전의 일이다. 1897년 [한국의 보고(寶庫)]라는 영문잡지 1월호에서 '허버트' 편집장은 미국의 한국잔디라는 글을 실게 된다. 놀랍도록 단단하고 생존력이 강하며 조밀한 잔디가 한국땅에 있다고 거창하게 소개한 것이다. 이 글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미국 최대 육종회사인 피터 핸더슨사는 주한 미국공사였던 알랜박사에게 그 씨앗을 보내달라고 의뢰한다. 상품화되지 않은 잔디라 시장에 있을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랜박사는 부녀자들을 고용하고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장학금까지 주어가며 잔디씨를 수집해 미국으로 보냈는데 이것이 우리 잔디가 미국땅을 밟게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한국잔디가 이국에서 오히려 그 진가가 인정되고 보급이 되었을 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없을 수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능상에서 다른 잔디류를 능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잔디는 환경에 대단한 저항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웬만한 악조건하에서도 견디는 힘이 별나다는 뜻일 것이다. 그 저항성을 미국인들은 눈여겨보았던 것이다.
자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사는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선 잔디는 미적(美的) 환경을 제공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잘 관리된 잔디는 마치 융단을 깔아놓은 듯하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대지 위의 잔디를 보고 감동받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이것은 잔디가 평면성과 녹색 특유의 작용에 의해 착시작용에 의한 실면적 이상의 넓은 공간적 감각을 제공해준다. 수목이나 건물이 수직 공간적 형으로 불안감을 조성하는데 반해 잔디는 안정감을 주는 특성을 지닌다. 더욱이 약간의 언덕을 지면서 전개되어 있는 잔디밭은 아름다운 여인의 젖무덤을 연상하게 되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함을 맛보게 한다.
녹지로서의 기능도 만만찮다. 서양의 정원은 바로 그들 활동공간의 연장이다. 잔디가 잘 가꾸어진 정원에서 가족과 함께 놀이를 하거나 가든파티를 갖는 것은 몸에 밴 이들의 생활이다. 돈이 많아 여유가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생활이 그들을 넉넉하게 보이게 하고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일 것이다. 이제 잔디가 있는 정원을 소유한다는 것은 더 이상 부의 상징이 되어서는 안된다. 생활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고질중의 하나인 '빨리빨리병'도 따지고 보면 여유스러운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 후유증이다.
잔디는 먼지나 유해가스의 흡착량이나 광합성작용에 의한 산소방출, 그리고 탄산가스 흡수량이 다른 식물에 비해 상당히 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1㏊의 녹지는 12시간당 900㎏의 탄산가스를 흡수하고 600㎏의 산소를 방출한다. 이때 흡수된 탄산가스의 양은 공기 6백만㎥ 중의 탄산가스와 같은 양이다. 인간이 호흡하는데 필요한 하루의 산소량은 약 0.75㎏이고 방출하는 탄산가스량은 1㎏이라고 볼 때 잔디의 정화적 기능은 실로 놀라우리만큼 크다. 이유는 간단하다. 잔디는 식재면적보다 10배가량의 넓은 엽면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4내지 5회정도 예초해 주는 금잔디의 회전률은 100∼120%나 되어 자연초지의 회전률 30∼70%를 훨씬 능가한다. 그래서 잔디를 [육지의 프랑크톤]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18홀 정도의 골프코스 하나가 십만명이 1년간 마실 수 있는 산소를 공급할 수 있다. 조그마한 읍소재지에 소재하고 있는 골프장은 지역의 세수(稅收)외에도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주는데 어째서 이것이 환경파괴의 대명사로 난도질 되야 하는가.
이른 봄철, 건조기에 들어서서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황사현상이 아니더라도 밖은 온통 먼지로 누렇게 변해버린다. 이런 날이면 안질환이나 호흡기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다. 그리고 먼지가 가옥이나 건물로 침투하여 기물을 오염시킨다. 특히 반도체 공장이나 병원, 정밀기기를 다루는 곳에서의 미세한 먼지는 기기의 오작동과 고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초장이 20㎝가량 되는 잔디밭에서의 발진량(發塵量)을 보면 나대지보다 무려 1/4∼1/7 정도에 불과하다. 잔디로 덮여져 있는 곳에 먼지없는 상쾌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경사지를 흘러내려가는 물은 붙잡아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도록 하자면 유속을 줄어야 한다. 이 유속을 줄이는데 잔디 만한 식물이 또 어디 있을 것인가. 필자가 일찍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나대지에서 연간 강우로 인해 유실되는 토량은 ㏊당 60여 톤에 이른다. 그러나 잔디로 피복된 토양에서는 불과 2㎏정도에 불과하고 그것도 초기에 발생해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유실량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빗방울의 충격을 잎이 흡수하므로 빗물이 흘러갈 때의 유속은 이미 그 힘을 상실하게 되어 흙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잔디의 역할이 지대할 진대 왜 학교운동장이고 도심 곳곳의 공한지들을 벌겋게 그대로 방치하는 것인지. 거기에 잔디라도 심으면 천연적인 휴식공간이 되는 것을 왜 구태여 귀중한 혈세를 낭비해 가며 무슨 체육시설을 만든다, 씸지공원을 만든다 하고 법석들을 부리는지, 잔디를 잘 아는 우리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다.